원신 6일차
예전 어느 외국의 게임 관련 기사 사이트에서, 평론가와 일반 플레이어 사이에 게임에 대한 평가가 왜 그토록 달라질 수밖에 없는가에 관해 게임을 리뷰하는 환경의 문제를 지적하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모름지기 결국 그들의 리뷰는 해당 리뷰의 조회수가 생명이고, 그래서 그들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정보를 가장 많이 찾는 출시 직전, 직후까지 리뷰를 작성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 대해 깊이있는 플레이와 분석을 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였다. 이 얘기가 비록 라스트 오브 어스 팡야2, 아니, 파트 2에 대한 평가가 유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왜 그렇게 극명하게 갈렸는지는 설명해주지 못하지만, 페르소나 5 원판이, 개인적으로 과감하게 말하자면, 그 뒤로 갈수록 형편없었던 완성도에 비해 높은 메타스코어를 받게 된 이유는 잘 설명해준다. 이는 요즘 '명작의 조건은 끝에 조지는 것이다'라고 하는 짤로도 자주 대변되는, 소위 앞부분만 독자나 시청자, 플레이어들에게 높은 완성도의 흥미로운 것들을 잔뜩 던져놓고 마지막에 가서 뿌려놓은 것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용두니미로, 아니, 용두사미로 끝나 화제가 되는 일들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아,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원신이나 혹은 야숨의 완성도에 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아직 후반부라고 부를 수 있는 곳까지 밀지 못해서 내가 어쩌고 평가할 입장도 아니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스팀 라이브러리에는 백개가 넘는 게임을 쌓아두고서도, 찜 목록에 수십개의 게임을 쌓아두고서도, 플스4 라이브러리에 또 십수 개의 시작부만 조금 건드리고 만 게임이 한가득 함에도 오히려 간만에 난 시간에 할 게임을 찾지 못하는, 그리고 그 이유가 오히려 있는 시간 동안 제대로 다 플레이 하지 못할 것 같아 시간이 아까워서라는 모순된 이유가 되버런 내 처지에 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난 로스트아크도 하고싶고, 원신도 굉장히 재밌게 즐기고 있다. 하지만 로스트아크는 이제 접속 보너스도 안 받고 넘어가기 십상이고, 원신의 필드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나는 시간 내에 최대한 진도를 뺀다고 어느새 쫓기듯 플레이를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세계관에 몰입하고 거기에 나만의 무언가를 덧붙이고 상상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깊이 있는 세계관을 가진 픽션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는 그런 깊이있는 창작물들에 ,소위, '입덕'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는 처지가 됐다. 게임을 플레이 할때도 마찬가지로, 로스트아크에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을 때에도, 위쳐 3나 패스파인더 같은 문서 가득한 RPG 게임에서 책들을 수집할 때에도 무엇 하나 놓칠까봐 있는대로 수집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읽지는 않았다. 어떻게 난 여가 시간인데, 그 글들을 다 읽고 있기가 너무 시간이 아까워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손도 못 댄 게임들이 라이브러리에 쌓여가고 있는 것이고.
오늘도 서론이 길었는데, 원신도 마찬가지로 게임 내에서 굉장히 많은 로어(lore)들이 있다. 캐릭터 별로 열리는 개인 스토리 뿐만이 아니라 도서관이든 길거리든 NPC가 주는 물건이든 수많은 책들이 있고, 나는 그것들을 전혀 읽지 않았다. 깊은 세계관과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많은 것들을 즐길 시간을 뺏기는 것 같아 그것들에 제대로 시간을 쓰지 못한다니 참 아이러니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몬드 기사단 건물 내 구석구석 놓치는 책 한 권 없도록 샅샅히 뒤져 모으면서 새삼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런 수많은 로어들이 숨겨진 게임들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다.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게임에서 내가 직접 파고들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그렇지만 세세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런걸 일일이 읽지 않으면 무언가 놓치는 기분이 든다고 싫어하는 이들이 있고, 또 소설가 이영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히려 이런 세세한 설정이 상상의 여지를 줄이고 신비로움을 없앤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고로 원신에 이런 요소들이 있다는 그 자체가 장점이거나 단점이 되진 않을 것이다, 취향이 갈리는 영역이지. 다만, 게임을 가볍게 즐기는 사람은 찾을 수 없는,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정보들을 끌어모아야만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면 그건 유저 입장에서 제대로 게임을 디자인 하지 않은 게으르고 나쁜 디자인일 것이다. 심지어 어디 뭐 판타지 15 처럼, 심지어 게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뿐만 아니라 사혼의 구슬 조각처럼 흩어져있는 수많은 구석구석의 텍스트 뿐만 미디어 믹스의 정보들을 끌어모아야만 게임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면 그런 아이디어를 낸 놈을 잡아다가 월급도 전 세계 계좌에 퍼뜨려놔서 직접 구석구석 찾아 인출하게 만들어야 한다. 뭐, 원신을 오래하지 않았고 게임도 많이 즐기지 못했으니 이것도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이런 로어들을 놓치지 않고 수집하고 싶지만 그것을 읽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모순된 심뽀는 오픈 월드를 탐험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구석구석, 저 높은 건물 위, 저 너머 계곡 사이로 분명 흥미로운 것이 있을진대, 나는 그것만 뒤지고 있기에는 너무 모자란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사실 이 플레이 일지를 유의미하게 쓰기 위해서라도 진도를 좀 빨리 빼야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심지어 몬드의 기사단 건물 내부를 뒤질 때 2층으로 올라갈 계단이 투명한 벽으로 막혀있자 '이거 너무 성의 없게 못 가게 해놓은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지만, 동시에 '아 2층까지 뒤지진 않아도 되서 다행이다'하는 생각을 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원신은 플레이어가 맵을 뒤지면서 컨텐츠를 찾아야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메인 퀘스트만 밀려고 해도 '모험 등급'이라는 시스템이 있어, 특정 모험 등급에 도달하지 못하면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플레이어는 다른 퀘스트 들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오브젝트를 발견하고 딴 길로 새게 되는 것이다. 삶과 게임, 다른 게임들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플레이어의 입장이 아니라 플레이어를 게임에 더 깊게 빠져들게 해야하는 개발사의 입장에서는 잘 만들어진 설계이긴 하다. 그리고 원신을 하다보면 이런 플레이에 맞춰 구석구석 참 신경썼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결국 서브 퀘스트를 찾아 해메게 됐는데, 기왕 가는 김에 근처로 가야되는 일들은 죄다 받아다가 한 번에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상 아직 제대로 깬 퀘스트는 없지만 이런 소소하면서도 캐릭터의 개성을 드러내는 퀘스트가 꽤 마음에 들었다.
또한 마커가 있는 오브젝트 외에도 야숨의 코르그 씨앗 퍼즐 같은 퍼즐들이 존재해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야숨에서는 무시하고 싶어도 그 보상이 워낙 커서(인벤토리 확장) 무시하고 게임을 하고 싶어도 어느정도 의식해가며 찾아야 하는데 반해, 가챠 게임인 야숨에서는 보상에 대한 기대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역으로 찾으면 좋고 아님 말고 식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리고 필드의 마커들을 뒤지다 보니 지맥이라고 하는, 로스트아크의 카오스 던전같은 일일 보상 도전으로 보이는 컨텐츠를 발견했다. 사실 정확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어찌됐건 이게 일일 퀘스트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난이도가 빡세서, 플레이어가 더 좋은 캐릭터와 무기를 얻고 캐릭터를 더 성장시키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한 번 잘못해서 게임에서 처음으로 철수가 죽을 뻔 했다.
다만 오픈 월드는 곧 버그가 아주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몰입을 깨는 순간들이 생긴다. 뭐, 사실 다들 스카이림이나 위쳐를 하면서 넘으라고 있는게 아닌 산을 목적지까지 직선 거리로 간다며 빠른 저장과 몸비비기를 반복하며 올라가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원신에서는 차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크나큰 결함이 있는데, 그건 바로 개와 고양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다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개발자들의 게으름으로, 속히 원신은 고양이과 개를 쓰다듬을 수 있는 패치를 단행해야한다. 아니면, 아직 내가 찾지 못한 것일 뿐 개와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근데 더 이해가 가지 않았던건, 쓰다듬을 순 없는데 공격을 시도할 순 있었다는 것이다. 상호 작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우연치 않게 공격을 했는데, 고양이가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은 구현되어 있다. 심지어 무척이나 현란하게 공격을 피하는데, 그러고는 가만히 서서 '흥, 너따위가? 이 몸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나만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런 고양이에게 폭탄을 터뜨려 불을 질러 본 것은 내 마음 속 두 마리 늑대 중에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줘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럴거면 왜 쓰다듬는 건 구현하지 않은 것일까?
사실 이쯤되면 이미 10연차를 할 만한 재화를 모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다. 원석을 인연으로 바꾸어 약 20연차 정도를 할 수 있는 재화를 모았다. 다만 그 얘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가챠가 개같이 망했기 때문이다. 가챠에 폭망하고 아연실색한 철수는, 마치 그 보답을 받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시 동생의 행방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일단 모험 등급부터 좀 올리고.